囊中之錐:낭중지추
회피 속에서 덜 회피하기 본문
토요일 밤에는 언니들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상처를 주고 말았다.
난 <사랑>을 몰라. <사랑>을 이해할 수 없어. 나는 <사랑>하지 않아.
저번에 s씨가 맞아요~ 행복은 추구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래요~ (맞나? 이렇게 말했던가?) 라고 했는데
사랑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사랑을 회피하면서 내 피해의식을 견고하게 하고 있다.
어제는 <사랑>에 대한 발언을 들었다.
난 못 들은 척 했다.
정당방위는 침해자에게 던지는 또 다른 가해행위란다.
상처는 그렇게 잘 받으면서 사랑은 왜 외면하는가? 알쏭달쏭한 인간의 의식세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밖으로 사랑을 발신하려고 한다. 거듭 알쏭달쏭.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쉬울 때가 있고,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쉬울 때도 있다.
내 의지로 되지 않는 일들과 내 의지로만 되는 일들.
새해가 되고나서 계속해서 외면, 회피, 도피, 기피...
가장 큰 일은 신앙에 대한 도망침이다. 집회에 가지 않은 것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안 가?
으휴. 으휴. 으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