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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방의 부처>를 기다리며

ㅈㅠㄹ 2021. 8. 5. 22:41

'작은 것'에 집착한 적이 있다. 작물을 키우며 필요치 않은 풀의 생장점을 자르는 순간, 뒷걸음질로 밟아버린 개미, 부슬부슬 부서지는 흙알갱이들. 그런 것들. 순간의 좋은 글감, 분자의 구조, 더이상 쪼개지지 않는 입자. 그런 것들. 그러다보면 존재, 없다고 하는 상태無, 빈 공간空, 또 그런 것에 빠져들어 집착했다. 그런 망상 허상이 좋았다. 나는 결국 없는 존재 아닌가? 그렇게 나를 지워가고 부정하다 보면 존재할 필요도 없고 열심일 필요도 없고 무력함에 대한 좋은 핑계가 되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새로이 논어를 읽고 있다. 하루에 한 줄, 두 줄 정도. 그러면 나는 논어를 읽고 있는 자가 된다. 

요즘은 그늘에 앉아서 허공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었다. 풀이나 나무나 하늘 따위는 보지 않는다. 정말로 내 시선이 허공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떠올려 보곤 한다. 조금 전에 읽은 글귀를. 공 선생님 말씀은 허공에서 활자로 둥둥 떠다닌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1분 전에 논어를 읽은 자가 된다. 덧붙여 1분 후에는 논어를 읽을 자가 된다.

그래서 공 선생님이 뭐라셨더라? 참말로 나란 인간은 쓰레기일 뿐이네, 쓰레기는 나에게 너무 과하지, 미물에 불과하다, 미물도 너무 과하지, 티끌 정도도 아깝지, 가장 작은 입자 정도이지, 가장 작은 입자라고 붙일 수나 있을까?

모든 것은 밖으로부터 온다. 나라고 하는 것은 없다고 보면 된다. 그게 내가 꾸역꾸역 논어를 읽으려고 하는 이유이다. 이제는 반대로 나는 '존재'에 집착하려 하는 것이 아닐까.

선생님은 불경을 읽어보라 권하셨다. 그래서 불경을 샀다. 들고 다니기 부끄러워서 이북으로 샀다. 물론 열어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김영민 선생님의 새 책 소식이 <옆방의 부처>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불경을 들고 다니는 분들께 실례되는 말로, 부처님께 실례되는 말로, <옆방의 부처>를 주문하고 나니 불경을 펴볼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부처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은 문득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겠다고 아이폰12프로를 구입했는데 전혀 찍지 않고 있다. 사진첩에는 일과 관련된 기록, 고양이의 어떤 순간 정도만 담기고 있다.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도 없다. 존재하지 않는 인간에게 구입 당한 최신형 스마트폰 렌즈는 덩달아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죄스러울 따름이다. 렌즈의 존재 가치를 찾는 것은 내 사명이고 死物을 살리는 일이다. 

 

나도 글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었다. 그런데 나는 글쓰는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 글쓰는 사람은 책을 낸 사람을 말한 것일까, 숨쉬듯 글을 쓰는 사람을 말한 것일까, 아니면 명작을 쓴 사람을 말한 것일까. 어쨌든 어떠한 사람도 되지 않았다. 그러한 욕망이 남아있지도 않다. 욕망이 강했던 때가 있다. 손바닥 크기 수첩을 늘 들고 다니면서 꽃이나 바람이나 구름을 적었다. 결국은 밖에서 오는 것이다. 또렷하게 묘사하는 힘도 없었다. 끈질기지도 못했다. 내가 아는 언어로 문자를 나열하다가 끝내는 수첩을 모두 버렸다. 남겨둘 가치도 없었다. 밖으로 나가면 거기에 늘 있는 것들인데 대단한 발견을 하기라도 한 양 종이와 연필을 낭비한 정도였다.

 

자고 일어나면 또 멍청한 하루가 시작된다. 그렇지만 어제는 반성한 인간이 된다. 그리고 또 잠들기 전 반성하는 인간이 된다. 그것이 과연 존재일까? 내일도 논어를 읽고, 불경을 들춰보고, 점과 선과 면을 그려보고 그런 인간이 되고, 그것이 나의 존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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